이별
이야기-마지막회. 어머님은 선산에 집을 짓고 문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 7시 30분에 우리들은 식사를 하고
사무실에
가서 장례식 장 비용을 정산을 하는데
처음
이야기 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이 나왔다.
그래서
영수증을 살펴 보니 다 알 수는 없는데
소모품에서
단가가 시중과는 많이 차이가 났다.
그걸
지적하였더니 슈퍼 가격이란다.
그러니까
소모품 가지고도 돈 벌이를 하는 거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래서
조용히 말했다.
“이
단가표를 고창 사람들 카페에 올려야겠네..”
그랬더니
그 사람 얼굴이 확 변하더니
영수증들을
내놓고는 이것 이것은 자기 재량으로
빼
줄 수 있다며 다시 계산을 하니 몇 십만원이 빠졌다.
나는
예상한 금액에서 약간 모자라게 돈을 가지고 가서
내놓고
있다가 “부조 들어온 것이 이것 밖에 없다"고 해서
다시
끝자리를 잘라 버렸다.
9시30분
장례식 장의 예배실에서 장례 예배를 보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니 장례식 장에 속하지 않는 외상 값을
받으려고
몇 사람이 와 있다. 그걸 또 해결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급히
서둘러 영구차에 오르다 보니 어머님과 친했던
분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읍내
시가지를 장례 행 열이 돌았다.
우리집
골목을 지날 때 나는 어머님과 이야기 했다
“엄마
눈으로는 못 보아도 영혼으로 봐 두세요.
집
앞 골목이에요.”
“엄마가
잘 가던 수퍼를 지나고 있어요”
“아버지가
다니셨던 군청을 지났어요.”
“남동생이
다니던 남학교를 지나네요”
나는
어머님이 생전에 잘 다니셨던 곳을 지날 때 마다
어머님께
보고를 하였다.
교회에
도착하였다.
목사님이
영구차로 오셔서 어떻게 할거냐고 하시기에
그냥
교회만 돌고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내려 장례 예배를 보지 않고
날씨도
추워서 그냥 교회만 돌고 장지로 출발하였다.
실은
즉
장로가
돌아가시면 교회당 속에서 장례식을 하지만
여자인
권사가 돌아가시면 교회 밖에서 장례식을 한단다.
그런
걸 가지고 남녀 차별을 하다니 기분이 나빴다.
어머님은
당신의 영정을 손자가 안고 가라고 유언을 하셨는데
둘째
사위가 영정은 사위가 드는 거라며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교인들이
차 두 대에 타고서 영구차를 뒤 따랐다.
선산에
도착하니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공기가
솔
향에 젖어 아주 좋았다.
사촌
오빠들과 형님들 그리고 인부들이 와서
가묘의
봉분을 열고 석관을 열어 놓고 있었다.
차가
산소 까지 올라 갈 수가 없고 약간의 숲으로 난 길을 헤치고
걸어가야
하기에 교인들은 몇 분만 산소로 오셨고 나머지는
그냥
차 속에 계셨다.
어머님의
널은 장정들에 의해서 운구 되어 무덤 앞에 내려졌고
석관에
약간의 흙을 넣고 그 속에 반듯하게 넣었다.
그리고는
가장자리에 흙을 넣으며 반듯하게 다시 자리를
잡느라
살살 가장자리를 밟는데 셋째 동생이
“밟지마!
엄마 아파요!” 하고 울부 짓는다.
어머니
속을 가장 많이 썩힌 딸이라서 더욱 더 슬픈가 보다.
나는 “뒤로 가 !” 라고 소리를 꽥 질렀다.
널
속에 들어가서 일하는 이종 동생은 하고 싶어서 하였겠는가.
일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 소리는 안 해야지….
어머니
위에 붉은 천이 덮어지고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국화꽃 잎으로 십자가를 그렸다.
다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고서 삽으로 흙을 떠 넣었다.
그리고는
우리는 물러났고 몇 사람이 나서서 널 위에 흙을
퍼
넣기 시작하여 평지와 같아지자 도착 된 뗏장을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놓으면서 봉분을 만들었다.
가장
위에 뗏장을 올리자 상주들이 돈을 올리면 그 위에
뗏장을
올려 갔다.. 뗏장은 잔디를 뿌리까지 한 삽 뜬 것이다.
뗏장
속의 돈은 인부들의 술값이란다.
날씨가
추워서 우리가 도착 했을 때는 모닥불이 훨훨 타고 있어서
따뜻하였는데
일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려 하니 모닥불이
죽어
가느라 추워진다. 다시 모닥불을 살려 돼지고기 수육을
꼬챙이에
꽂아서 모닥불에 굽는 사람도 있다.
바베큐를 만들려고…
스티로
풀 박스 속에 넣어 온 육개장과 밥은 펄펄 끓듯이
뜨거웠다. 정말 세상은 좋아졌다. 음식을 뜨거운 채로
운반하고
하루 종일 뜨겁게 가지고 다닐 수 있다니..
식사를
하면서 일가 친척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머님은
시집을 잘 가셨다고 말 하였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서 편하게 먹고 살다 가셨다고
말들을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 놓으셨던
논과
밭과 산 까지 다 팔아서 생활비로 사용하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수 십년을 더 살았다.
오직
하나 남은 아버지의 재산인 집을 아들에게 물러
주었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팔도록 하였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결혼식이 오후에 둘이나 있다면서
식사도
아니하고 가셨다.
남아
있는 일가 친척, 남자들은 술 마시고 식사하고 …….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옆에 안장되었다.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탁 트여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다.
우리들은
어머니의 무덤을 보면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사시는 장소만 바꾸어서
자고
계신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끝까지 편안하게 해 주었다.
다시
영구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두 사위가 너무도 수고해서 사람들이 효자 아들인
줄
알았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우리 남매들은 사위들 앞으로 들어온
부의금을
되돌려 주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사위들이
우리도
자식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서 안 받겠다고
거절
하였다.
우린
설득 하였다 직업을 버리고 며칠을 장모님 곁에서
병간호
하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받아야 어머님이
좋아
하실 거라고 설득을 하였다. 그래서 제부들은
자기
몫으로 들어 온 돈을 받았다.
나중에는
고맙다고 하였다. 요즘 경제가 나쁘니
잘
사용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어머님의 장례는 무사히 마쳤다.
어머님은
살아생전에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그
높은 자존심을 지키며 편하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자식들의 효도 받으며 사셨다.
죽을
때 까지 허리 굽지 않고
눈이
잘 보이고
귀가
잘 들렸으며
우리들에게는
때때로 게그맨이었다.
기억력이
뛰어나서 어릴 적 읽은 책이나
늙어서
읽은 책을 이야기로 술술 풀어 내셨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우리가 때때로 감탄 할 정도였다.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도 어머님은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당신이 죽은 후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미리
다 준비해 놓으셨다.
우리들이
허둥대고 실수 할까 봐서다.
그것도
어머님의 자존심이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어머님이 건강하게 살아 주신 것이 가장
감사하다.
주위
사람들은 어머님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고 말한다.
나는
상복을 태우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에게 해 주신 마지막 옷이기에..
동생들이랑
사람들은 태워야 한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말씀하셨다.
윤달에
성을 도는 것은 나라에서 만들어 낸 미신이라고
왜냐하면
성을 적어도 삼년 마다 밟아 주어야 튼튼해지고
그
걸 돈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윤달에 성을 돌면
몸이
아프지 않고 극락왕생한다고 퍼뜨렸다고....
정월
대보름날 논두렁에 불을 지르는 것은 해충의
알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나는
상복을 태우지 않고 다른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며
어머님을
생각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님은 병이 들어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에 나의 상복은 깨끗하다.
상복을
태우는 것은
아마도
병으로 돌아 기산 분들의 병균이 상복을 거쳐
옮길까
봐서 생겨 난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林光子 2004년 늦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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