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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by 임광자 2006. 1. 28.

 

 위 사진은 1930년대의 아버지의 사진이다. 오른쪽이 아버지다. 

지금부터 약 70여년전 사진이다.

 

 

나는 오랫만에 아버지의 편지 묶음을 열고 아버지와의 추억에 잠겨 본다.
나는 아직도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을 다닐 때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편지들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읽으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빛 바랜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면 그 편지 속의 아버지의 혼이 나를 초심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다.
잘못을 할 때면 중국 고대사에서부터 한국사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였다.
덕분에 역사 공부와 한문 공부를 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지금은 역사도 한문도 다 잊혀지고 가끔 가다 추억의 토막처럼 생각나지만 그래도 역사 이야기가 기사거리로 나오면 귀가 번쩍 뜨인다.


아버지는 철저한 유교와 도교 교육을 할아버지로부터 받고, 신식교육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유학자며 한의사여서 도교에도 열심이었고,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도 정말 어려운 학문이야 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해방 전에 돌아가셨지만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이 될 것과 육이오가 일어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 자취당 임상학(林相鶴)씨는 효행이 뛰어나서 효행비가 세워졌다.


아버지는 내 언니가 중학교에 다니다 장염으로 세상을 뜨자 기독교에 귀의하시고 장로가 되셨다. 그러나 관상(골상)을 아주 잘 보았으며 뼛속 깊이 뿌리 박은 유교사상은 돌아가실 때까지 지니고 살으셨다. 스님친구도 많았고 다른 종교인들도 많이 사귀었다.
지금부터 오육십년전에는 기독교을 다니던 분들도 유교사상을 많이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시조 읊는 법과 관상 보는 법을 배우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과학의 시대니 그런 것을 배우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그때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과학은 종교 뒤를 따른다"
"과학과 종교는 전혀 달라요."
"아니다. 종교는 믿음이다. "
"......."
"과학자들은 실험을 할 때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한다"
"무슨 말씀이세요?"
"부싯돌을 부딪쳐서 불을 내는 것을 예로 들면 부싯돌을 손에 들었을 때는 부딛치면 불이 생긴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부딪치는 것은 과학실험이다.
불이 생기는 것은 그 결과이다.
어떤 과학자도 실험을 하기 전에 믿음을 먼저 가진다."
아버지의 "과학은 종교 뒤를 따른다" 말씀은
나에게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은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시조를 읊는 법과 관상 보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시조 읊는 법은 그 당시 여자가 시조 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관상은 사람을 보면 먼저 관상을 보고 판단을 할까봐서였다.
한문 붓글씨 쓰는 법은 잘못 쓰면 손을 때리는 바람에 안 맞고 안 배우겠다고 버티다 못 배우고 한문공부는 엣날 이야기를 너무 해주셔서 듣기가 싫어서 못 배우고 아버지의 신식책 을 몰래 갖다 읽는 것이 내 낙이었다.


그 후로는 내가 실수 할 때면 역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나중에 서울로 올라와서 가장 좋은 것이 아버지의 역사 이야기를 안 듣는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셨던 말이 모두 맞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늘쌍 나에게 귀가 아프도록 말씀 해 주셨다.
나는 삼십 전에 목숨을 거는 고생을 하게 되고 삼십이 넘으면 운이 돌아오며 평생동안 공부를 할거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똑 맞아 떨어졌다. 왜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가는 것일까? 어떻게 딸의 앞날을 미리 짐작하고 계셨을까?


지금은 아버님 슬하에 있을 적에 더 많이 배우지 않았을까 뼈가 저리도록 후회가 되지만....
세월은 돌이킬 수가 없다. 내가 후회할 때는 이미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아버지는 내가 책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일도 시키지 않았고 점심을 오히려 해서 주셨다.
간식거리를 내 방문을 열고 가만히 들여 놓고는 가시었다.


그러나 때때로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초년고생이 심하니 배워두어야 한다면서 바느질이며 밭일을 시키셨고, 장작개비 하나를 잘게잘게 작은 도끼로 잘라서는 손가락 두개 굵기로 만들어 그걸 풍로에 지펴서 솥에 밥을 하게 했는데 이틀간을 쓸 수가 있었다. 잘게 잘라진 나무막대는 잘 타서 연기도 나지 않는다. 얇게 저며진 관솔조각은 성냥개비 하나면 불이 붙었다.


관솔이란 가지에서 가지가 갈라져 나가는 곳으로 나무진이 범벅인체로 붙어있고 그 부분은 색깔부터 진하고 나무 질도 단단했다. 말하자면 역청이 모여있는 부분이다. 어릴 적 변소에 갈 때 관솔개비에 불을 붙이고 가면 환하고 관솔 타는 냄새도 좋았다.


앞에 가는 아주 멋진 여자를 보고 뒤 따라 가보면 산동네 가난한 집으로 가기 일 수라면서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아무렇게나 입길 좋아한다.


아랫사람을 시킬지라도 일 시키는 내용을 알고 있어야 주인 노릇을 잘 할 수가 있고, 모르고 있을 때는 일을 하는 사람이 주인행세를 하고 주인은 그의 아랫사람이 된다면서 도배일, 세멘일, 재봉일, 간단한 목수일 등을 시켰다. 이런 일은 훗날 실험실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유용하게 응용되어 철저하게 일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 나 홀로 생활생물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근본은 아버지의 철저한 가정교육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친구들이 우리집에 와서 나를 보면 그렇게 부러웠단다. 항상 내가 책을 보고 있는 것이.... 그 당시에 여자가 책을 보며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꿈과 같은 생활이었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내가 행복 한 줄을 몰랐다.

 

의식주 걱정 없이, 때때로는 식사시간도 아깝다며 해 놓은 밥을 갖다 내 방에서 먹어버려서 어머님은 나에게 말씀 하셨다. "밥 먹을 때나 얼굴 좀 보자". 동생들에게 돈을 조금 주면 신문도 갖다 주고 세숫물도 떠다 주었다. 그 당시에는 나를 골방에 가두고 내가 좋아하는 책만 보라고 하면 나는 그렇게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책을 좋아하였다.


다시금 옛날처럼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보며 하고 싶은 실험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요즘에는 책을 볼 시간이 너무도 부족하다. 도서관에도 가고 싶고 문헌조사도 해가며 책을 보고 싶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다. 그런 날이 머지 않아 오겠지 ...

 

 

나는 “람보”라는 영화를 보면 아버지가 나에게 교육시킨 내용과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시켜 주셨으니까...그러기에 알콜중독자 곁에서도 그 오랜 세월 동안 견디었는지도 모른다.

 

 

林光子 200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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