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산소 벌초 이야기
남동생이 살았을 적에는 부모님 산소 벌초를 사람을 사서 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젠 벌초 문제가 내 문제가 되었다. 지금 계획으로는 내년 봄에 수목장을 할 예정이어서 올해가 마지막 벌초가 되기 때문에 내 손으로 해 드리고 싶었다. 아침 7시 10분 반룡. 정읍을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신기까지 차비가 얼마예요?
-1300원이요.
-옛! 큰일이다. 작년에 송촌에서 탈적에 1000원을 내서 지금도 그런 줄 알고 왕복 차비로 천 원짜리 두 장과 만 원짜리인데 만 원짜리도 받아요?
-만원을 받으면 천 원짜리를 세어서 내어 드려야 하는데 돈을 셀 수가 없어요. cctv에 찍히거든요. 저희는 돈을 만질 수가 없어요.
말하면서 고개를 들어 위를 본다.
-그럼 아저씨가 정읍에서 고창으로 가는 시간은 몇 시예요? 제가 고창에서 내려서 바꾸어 차비 드릴게요.
-5시 넘어서요. 제 차 타면 그렇게 해드릴 게요.
신기에서 내려서 청송을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걷는데 두 갈래 길이 나와서 동구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아저씨에게 청송 가는 길을 물으니 오른쪽 길로 가란다. 청송을 바라보며 가는 내 발자국을 보니 타원형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갔다면 바로 갈 수 있었는데 돌아서 간 셈이다. 가는 길바닥에는 뱀이 구부려진데 살아있는 것처럼 죽어있다.
저기 보이는 집 두 채 바로 뒷산에 부모님 산소가 있다.
벌초를 끝내고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이다.
산소에 도착해서 보니 길도 무덤도 보이지 않는다.
내 배낭 속에는 이것저것이 들어있어 좀 무거웠다. 벌초에 사용할 기구로 아주 잘 드는 어제 산 낫과 그물망이 있는 모자 그리고 큰 양파망자루와 모기약과 갈퀴와 면장갑과 코팅장갑 등이 있다. 먹을 것으로는 사과 3개와 원비 4병과 빵 3개와 승차하기 전에 산 김밥3줄 2리터생수 1병이 들어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오거나 지나가면 주려고 넉넉히 가지고 갔다. 원비를 더 가지고 갈 거였는데 배낭이 무거워서 더 넣지 않았다.
산소에 도착하여 부촌오빠에게 벌초를 하고 있다고 알렸다.
-오빠! 나 지금 벌초하고 있어요. 오늘 뭐해요?
-마늘 심어.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 81세인데 일을 하려니 힘이 드시겠지.
그물망이 달린 모자를 쓰고 그 위에 폭이 크고 길이가 조금 짧은 양파 망을 덮어 쓰니 목 조금 아래로 양파망을 오므리고 여는 끈이 내려온다. 그걸 조금 오므려서 모기가 들어갈 틈을 없앴다. 얼굴도 모기장이 처지지만 다 보인다. 가지고 간 모기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모기가 윙윙거릴 뿐 얼굴로 접근을 못한다. 손에는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시멘트 일을 할 때 사용하던 방습 코팅된 빨간 장갑을 낀다. 풀에 이슬이나 물기가 있어도 손이 젖지 않는다. 발에는 땀이 차도 괜찮은 발가락 양말을 신었다. 그 위에 고무로 된 발등까지 올라오는 신발을 신었다. 조금 둔하지만 참 좋다. 모기약 안 뿌려도 되니 냄새 나지 않아 좋고 손이 젖지 않아서 좋다. 먼저 부모님의 봉분인 이불을 깎아드리고 나서 주변의 풀을 베고 있는데 부촌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렇잖아도 어디까지 풀을 베어야 할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오빠! 바닥을 얼마큼 해야 해요?
-앞은 좀 많이 하고 옆과 뒤는 1m 정도를 하면 돼. 잘 하고 있어?
-다 끝나고 벤 풀을 아래로 버리고 갈퀴질을 하면 되어요. 오빠! 만나고 가고 싶은데 오빠가 밭에 있으니 내가 어딘지 몰라서 궁평에 못가겠네.
-아냐. 텃밭에서 마늘 심고 있어.
-텃밭이야. 그럼 내가 차비가 천원인줄 알고 왕복 차비로 천 원짜리 두 장과 만 원짜리를 가지고 왔는데 신기에서 내릴 때 1300원이래 그래서 잔돈은 700원밖에 없어. 만 원짜리는 받을 수 없데. 고마운 기사분이라 5시 20분차 타면 고창에 내려서 바로 바꾸어 내면 된다고 하였는데 그 때까지 기다리려야 해. 그러니 오빠가 천원 줘. 원비랑 빵이랑 사과랑 오빠 주고 갈 게.
-그럼 궁평 와서 2시 35분 차 타고 가. 여기서는 1200원이야.
그러고 보니 거리에 따라서 차비가 달랐다.
-지금 바로 갈 게요.
벌초를 하고 갈퀴로 긁어내고 있다.
내 배낭을 어머님 산소 위에 놓고 어머님이 내 채취를 느끼시기를 바란다.
내가 아기 였을 때 방이 추워서 나를 어머니 배위에 올려 놓고
키우셨다고 하는데 내 뒷통수는 유난히 나왔다.
나는 이미 오빠가 말한 경계선 보다 더 넓게 벌초를 하였다. 베어서 쌓아놓은 풀을 두 팔로 들어 올려서 아래로 갔다 버렸다. 갈퀴로 쓸어서 쌓이는 풀을 두 팔로 들어서 아래로 내다 버렸다. 벌초는 7시 50에 시작해서 12시 30분에 끝났다.
궁평으로 가는데 많이 돌아야 할 것 같다. 그 때 오토바이를 탄 아저씨가 지나간다.
-아저씨!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아저씨가 돌아본다.
-궁평으로 가려고 하는데 가까운 길 없어요?
-궁평이요 누구를 만나러 가는데요?
-사촌오빠들이 살아요. 임경주라고.
-아하! 임필주씨 임경주씨요.
-네.
-저기 좁은 논둑길을 가로 질러서 가면 큰길 나와요.
-저렇게 좁은 길을 가요?
-빨리 가려면 그 길로 가서 저기 보이는 전보선대 있지요. 전보선대 앞으로 가면 궁평가는 큰 길이 나와요. 그 길 따라 가면 궁평이예요.
-아저씨는 어디 살아요?
-궁평 아래 저어기 고래촌에요. 어디서 오셨어요.
-고창 읍 시장통이요. 시장 편의시설이 지어지고 있는 옆의 이층건물 생활생물연구소에 살아요.
-제가 전주에서 살다 온지 일 년도 안 되어서 고창 지리 잘 몰라요.
-저도 60년대 중반에 대학 간다고 서울 가서 살다가 2008년도에 내려와서 어려서 무진장 다녔던 이곳인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는 힁허케 가버린다.
풀이 무성한 좁은 논둑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큰길로 해서 전보선대를 돌아서 궁평을 바라보며 걷는데 멀리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손 흔드는 모습을 보고 여러 갈림길에서 오빠가 손을 흔드는 모정 앞으로 갔다. 부촌 오빠가 천원을 내민다.
-오빠 여기서는 1200원이라고 했으니까 내가 지금 700원 있거든 오백 원짜리 하나만 주면 돼.
-그냥 천원 가지고 가.
-아냐 오백 원짜리 있지. 오백 원만 줘.
오빠가 방으로 들어가서 오백 원을 가지고 나온다. 내가 배낭을 열고 마루에
빵3개, 원비3개, 사과 하나를 놓았다. 오빠는 빵과 사과와 원비 두 개를 들고서
-지금 올케가 마늘 심고 있는 데로 가자.
올케는 비닐하우스에서 바닥에 깔린 검정비닐의 구멍 속에 마늘을 심고 있다.
-언니!
불러도 꿈쩍 하지 않는다.
-귀가 먹어서 아주 답답해 죽겠어.
내가 아주 큰소리로 부르니 고개를 돌린다.
-아이구 광자 아기씨고만.
-텃밭이 넓어서 좋겠어요.
-밭은 하나도 없어.
그럴 것이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밭일을 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 것이다.
-점심은 먹었어요? 내가 옛날 같으면 벌초한다고 하면 점심이라도 해 가지고 산에 올랐을 텐데 이젠 오빠도 나도 산에 못가.
-김밥 있어요.
-동생이지금 몇 살이지?
오빠가 묻는다.
-음력으로는 71세고, 양력으로는 70. 생일이 음력 섣달이거든.
허리가 구부러져 살고 있는 올케가 나를 바라본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벌초도 나는 못가고 필주가 다 했어. 이젠 벌초 할 사람이 없어.
나는 마지막 하나 남은 김밥을 꺼내 먹으며 한 조각 드리니 올케가 하나 먹고 오빠는 먹지 않는다.
-우린 금방 점심 먹었어. 배가 불러.
-그럼 빵하고 원비 드세요.
-조금 있다가 새참에. 참 여기서 2시 35분까지 기다렸다가 차 타느니 그냥 천천히 걸어서 송촌 가서 버스 타고 가. 거긴 버스가 더 많고 여기서 보다도 오십 원이 더 싸.
-그럴까.
나는 물이 남은 물병을 놓고 일어났다. 오다가 나를 아는 친척 아주머니를 만났다. 나는 모르는데 그분은 알고 계셨다. 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
-벌초하고 오는 거예요. 여기 어느 집엔가에 인촌오빠(임홍주)가 사는데 있으려나요?
-있을 거예요. 한 번 들어가 봐요.
오빠 집으로 들어가니 디스크로 불편한 올케가 실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어머 언니!
많이 좋아졌나. 꼼짝을 못해서 오빠가 살림이고 언니수발을 다 들어 주는데... 모퉁이에서 오빠가 돌아 나온다.
-오빠!
한참 머뭇거리다가 나를 알아본다. 이 오빠는 아마 90세인가 그럴 것이다.
-벌초 끝내고 가는 길에 들른 거예요.
나는 드릴 게 없어서 배낭에서 먹으려고 두었던 마지막 빵 하나를 꺼내며
-오빠 지금 드릴 거라고는 이것뿐이네요. 오빠가 계시는줄 알았으면 뭘 사 가지고 오는 건데. 게이트볼 하러 가시고 없는 줄 알고. 그래도 한 번 들어왔다 가고 싶어서 들어왔어요.
꾸역꾸역 걸어서 송촌 앞 버스 타는 곳에 왔다. 이곳에는 버스 시간표도 없다. 플라스틱 위자에 앉아 있는데 모기가 무지막지하게 달려든다. 권색챙모자를 벗고 다시 모기장 모자를 꺼내 쓰고 도로변 가에서 왔다갔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려도 버스는 아예 지나가지 않는다. 1시45분에 도착하였는데 2시가 넘어도 차는 오지 않고 내가 탈 수 없는 차들만 쌩쌩 달린다. 인촌오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
-오빠!
-내가 동상한데 해줄 말이 있어서 왔어.
부모님 수목장에 관한 문제였다. 너무 너무 고마웠다.
-여기서 버스가 몇 시에 지나는지 알아.
-이쪽은 모르고 궁평과 신기 쪽만 알아요.
2시 3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아 부촌 오빠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나중에는 아주 길게 오래도록 신호가 가게 했더니 전화를 받는다. 아마도 텃밭에서 일하다가 전화 소리를 듣고 왔나 보다.
-오빠! 거기서 그냥 기다렸다 탈 걸. 차가 지금까지 않와. 다리 아파서 다시 갈 수도 없고....
내가 한참을 푸념 하다가 끊었다. 얼마 후에 전화가 온다.
-여기는 조금 있으면 차가 올 건데. 거긴 1시 45분차가 있고 3시 15분에 있어. 그냥 기다렸다가 타고 가. 어디 시원한데 앉아서 기다려.
즉 내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지나갔다는 거다.
미안해서 웃는 웃음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들린다.
드디어 3시 10분에 버스가 와서 탔다. 3시 15분이라더니 5분 빨리왔다.
-차비가 얼마예요?
-1150원이요.
나는 돈 통에 오백 원짜리 두 개와 백 원짜리 두 개를 넣었다.
기사 아저씨가 오십 원짜리가 나오지 않자 돈 통을 막 두드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돈 통을 들어내서 무언가로 쑤시고 때리고 야단을 쳐도 돈이 나오지 않는다. 백 원짜리 몇 개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걸 주어 담는다. 다시 시도해도 되지 않는다. 십 분이 지났다.
-아저씨 고창 가서 고쳐요. 오십 원 안 받아도 되어요. 다른 사람 잔돈 내 줄 것 때문에 그려요? 고창 가서 기술자에게 고쳐 달라고 해요.
-내가 기술자에요. 타는 사람도 없어요.
그 말에 버스 안을 둘러보니 나 하나다.
-저 하나에요.
-한사람도 없을 때도 있어요.
-장날에는 많지요?
-장날에도 없어요. 어디서 내려요.
-시장통에서요.
드디어 아저씨가 버스를 운전한다. 고창에 다 와서 서울 동생한테서 전화가 온다. 한참 통화를 하고 있는데
-여기 시장통이에요. 내려요.
-야 끊자.
집으로 와서 씻고는 그대로 누웠다. 몇 시간을 누웠다가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앞에 보이는 산이 방장산이다.
방장산 아래에 부모님 고향인 반룡리 궁평 마을이 있다.
용띠 동갑이었던 부모님은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고 결혼하셨다.
갈곡천
저수지가생기기 전 아주 옛날에는 이곳에 물고기도 게도 밤이면
새까맣게 깔린 정도로 많이 잡혔다고 한다.
2012.09.20. 林 光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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