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 소설 63: 단풍잎이 들려주는 이야기
봄엔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앙증맞은 잎들이 잿빛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을 하더니, 여름엔 성숙한 처녀에서 농익은 아주머니가 되어 가며 세상을 온통 녹색으로 물들여 열매를 키우더니, 가을이 오니 봄과 여름의 정열을 노랗고 빨갛게 분출시켜 세상을 하직하는 모습이 눈부시다. 어쩜 시작보다 마무리가 더 아름다운 잎이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며 일생을 듣고 싶어서 물었다.
“나에게 할 말이 있는가?”
“할 말이 많지. 들어 줄려나?”
“그럼 읊어 보게나.”
다음은 단풍잎들이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다.
★★★
울긋불긋
내 몸이 변하고 있네.
내가 바라서 이렇게 고운 옷을 입게 된 것이 아니야.
어쩔 수가 없었지.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라서
내 초록 옷이 울긋불긋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어.
내가 봄빛을 맞아 초록 옷을 입고 태어난 후로
나는 내 가족의 먹을거리를 책임졌다.
내가 없음 내 몸 굶어 죽는다.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죽는다.
나는 대단한 존재다.
모든 생명체가 나로 인해 살고 있다니.
그 이유를 말해 드리리다.
나는 엽록체를 가졌잖소.
이 엽록체가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햇빛을
화학에너지로 확 바꾸어서 탄수화물 속에 저장하는 공장이다.
지구 상에서 유기물을 최초로 생합성하는 공장이 바로 엽록체다.
내 몸이 녹색인 것도 바로 이 엽록체가 녹색이기 때문이다.
엽록체가 내 몸을 지배할 적에
나는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었다.
엽록체가 탄수화물을 생합성하면
탄수화물은 내가 먹고도 남아돌아서
포도당으로 바꾼 후에
온몸으로 뻗은 체관을 통해 온 몸으로 보냈다.
세포들은
탄수화물을 원료 삼아
단백질도 만들고
지방도 만들고
비타민도 만들고
핵산도 만들고
유기질로 된 모든 유기물을 만든다.
그리하여
각종 유기물들은
열매 속에서는 열매를,
씨앗 속에서는 씨앗을
줄기를, 새 줄기도
뿌리를, 새 뿌리를
모두 모두 키웠다.
내 덕으로…….
그런데 알고 있는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토끼 사냥에 이용됐던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죽임을 당하지.
내가 바로 그 신세이지
해가 머무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기온은 떨어지고
건조해져서
내가 품고 있는 엽록체가 광합성을 못하게 되어
공장 문을 닫고서 시들시들 앓게 되었지…….
탄수화물 생산량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것을
알게 된 줄기가 하루는 잎자루와 줄기 사이에 있는
물관 속에 떨켜층을 만들더군.
떨켜층은 바로 떨어져 나간다는 부분이란 뜻일세.
떨켜층이 생기자 줄기로부터
물이 오지 않더군.
물을 먹지 못해 목마름에 지친
내 몸 속의 엽록체들이
그냥 죽어가더군
그러더니
왜 있잖나
호랑이 굴속에 호랑이가 없으면 토끼가 왕이라고…….
엽록체가 녹색인 것은 엽록소가 녹색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엽록체 속에 엽록소만 있는 것이 아니었지
그 속에는 카로티노이드와 크산토필도 있었다네.
카로티노이드는 붉은색 계통이고
크산토필은 누런색 계통의 색깔을 가진다네.
엽록소가 없어지자
바로 카로티노이드와 크산토필의 색이 두각을 나타내고
잎들이 누렇고 붉게 변색되어 단풍잎이 되더라고.
그렇지만
단풍들 중에는
아주 새빨간 핏빛 같은 붉은 단풍도 있고
아주 황금색 같은 단풍도 있어
그것은 화청소(안토시안)가 만들어냈다네
안토시안은 액포 속에 있는데 열매나 꽃 속에 들어서
아름다운 색깔을 뽐내지.
또한, 안토시안은
액포 속의 액성이 산성이냐 알칼리성이냐 중성이냐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나타나서
꽃 장사들이 그걸 이용해서 자연 상태에서는 없는
꽃의 색깔을 탄생시킨다고 하드군
액포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액체를 품고 있는 주머니야
식물체가 물을 많이 품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액포가 많아서야.
과일을 그냥 먹을 때 보다
갈아서 먹으면 물이 엄청 더 많이 나오지
그건 갈아질 때 액포가 터져서 그 속에 갇힌 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떨켜층 덕분에 물을 먹지 못해 가벼워진 몸을
바람이 불면 훨훨 날아서 춤을 추다가 뿌리 위에 떨어지지
단풍들의 춤은 사무(死舞)지. 아암 사 무지. 죽음의 춤이지
우린 가지고 있는 기운의 원료를 다 사용되고 나면
더 이상 지탱 할 수가 없어
그 가벼운 몸이라도 땅 속에 살고 있는 중력이 잡아 다녀서
아래로 몸이 당겨지고 그때 떨켜층이 떨어지게 되지
즉 줄기는 미리 잎자루가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딱지를 만들어 잎 떨어진 부분을 미리 보호하기 위해서
떨켜층을 만들어 놓은 거야.
그렇지만
겨울이 되어도 앙상하게 마른 잎들이 줄기에 붙어있는 나무들도 있어
그런 나무들은 고향이 따뜻한 곳이었지.
그래서 추워져도 떨켜층을 만들 수가 없어 잎이 떨어질 수가 없고
삭풍이 몰아치면 그냥 줄기에서 찢겨 나가는 거야.
아프겠지…….
윤회라는 말을 아는가?
그건 완전히 부서져야 가능해.
내가 땅위로 사뿐히 내려앉으면
밟히기도 하고
미생물에 먹혀서는
점점 부셔져서
흙과 같은 모습이 되어
부엽토가 되어서는
뿌리 곁에 다가가면
뿌리털은 물에 녹아 있는 나를 보고
반갑다고
맛있다고
쑤욱 빨아먹지
그럼 나는 다시 뿌리로 줄기로 들어가
그들의 몸을 이루는 성분이 되지
봄이 되어 내가 뿌리 속으로 들어가면
새잎을 틔우고
새가지를 틔우고
꽃이 되고 열매가 되고 씨앗이 되어 다시 태어나지
그래서 나는 금방 무기질로 변하지 않는다네.
서서히 변해야
서서히 변신을 할 수가 있으니까
우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물질은
이렇게 삼라만상을 윤회한다네.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은 없다네.
변신을 할 뿐이지.
내 친구들이 자네의 먹을거리에 있었다면
그들은 이미 자네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있겠지.
또는
나와 네가 한 몸을 이루는 동료가 되기도 하겠지.
물질은 삼라만상 속을 돌고 도니까.
★★★
나는 단풍잎과 낙엽이 주절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인간사도 똑같다고 들려준다. 내 발밑에서 바스락 거리며 부서지는 단풍잎은 나에게 고맙다고 할까? 빨리 부서질수록 더 빨리 윤회 과정을 통과할 터이니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낙엽으로라도 조금 더 머무르다가 윤회 과정으로 들어가고 싶을까? 우리들은 어떤 쪽일까?
林光子 200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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